‘주문한 팥죽이 스테인리스 대접에 나온다.
자줏빛 국물 위로 하얀 면발이 날 유혹한다.’

차에서 내리니 볕의 열기가 습기와 뒤엉켜 내 몸을 달군다. 땀이 등 가운데로 흘러내린다. 분명 맞게 내렸는데 간판이 보이질 않는다. 다시 차를 움직일 생각은 접는다. 늦더위를 퍼붓는 태양 앞에 나는 무기력해진다.

아직 남아있는 자동차 엔진의 콧김까지 몸서리쳐진다. 배롱나무 줄기가 늘어져 자동차로 그늘을 드리운다. 이운 꽃잎 사이로 검붉은 열매가 눈을 부릅뜬다. 햇볕에 영근 열매가 ‘검은 구슬’이란 팥알과 닮았다.

배롱나무 열매를 보니 뱃속에서 신호가 온다. 이 열기에 허기져 쓰러지기 전에 목적지로 움직여야 하리. 한낮 열기에 팥죽집도 쓰러진 건가. 찾는 팥죽집이 없으면 배롱나무 열매라도 씹어 삼키리라. 내 기억 속 식당 자리에는 간판도 없는 가게가 들어섰다. 골목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마음먹는다. 시너지를 위해 T맵을 다시 가동한다.

차 세운 곳에서 3분 거리로 뜬다. 내리쬐는 볕에 걸음은 시나브로 늦춰지고 간절한 팥죽 생각이 점차 아득해진다. 한 골목만 돌고 그만둬야겠다 다짐한다. 오른쪽으로 꺾으니 건물 사이에 현수막 글씨가 날 반긴다. 보물찾기로 쪽지를 발견한 행복이 달려든다. ‘ㅇㅇ 팥죽 이전’이라는 글자 옆 화살표가 나에게 오라고 손짓한다. 화살표에 끌려 두 발이 앞다투어 나간다.

걸음이 멈춘 문 앞에 ‘콩죽 개시’란 푯말이 날 반긴다. 식당 문을 여니 열기가 후끈하다. 선풍기 한 대가 돌아간다. 밥때가 지난 시간이라 내 예상대로 식당 안은 손님이 없다. 혼죽을 위한 내 계산된 시간이다. 내가 자리에 앉자 사장님은 에어컨을 켠다. 장사가 안되나 보다. 손님 없는 시간이면 사장님에게 에어컨 전기료조차 사치인가 싶다. 갑자기 혼자 죽을 먹으러 온 게 뻘쭘하다. 팥죽을 시키는 내게 사장님이 메뉴를 다시 묻는다.

내가 한여름에 팥죽을 먹자면 다들 시큰둥하다. 더운데 냉면이나 콩국수가 아닌 뜨거운 팥죽이라니, 이해 못 하는 눈초리다. 삼계탕은 먹으면서 팥죽은 싫단다. 이제는 혼죽이 편하다. 변명 없이 내킬 때 먹으면 그만이다. 딱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음식도 없는 나다. 언제부터 팥죽에 대한 갈증이 생겼는지 되짚는다.

내가 입학 전 시골에 살 때다. 동짓날이면 팥죽을 쒀 옆집과 나눠 먹었다. 팥죽 들고 이웃집 가는 엄마 뒤를 따라가다 나는 돌부리에 넘어져 이마를 찧었다. 나쁜 기운을 쫓는 팥의 효과인가. 이마의 고통은 희미하기는커녕 기억에 없다. 나는 애써 아픔을 떠올려 즐기려 하나.

까불대던 어린 시절, 이마 위 피가 배인 붕대의 잔상만이 또렷하다. 비릿한 피 냄새에 뒤섞인 팥죽 향은 파노라마처럼 거꾸로 돌아가며 되감기를 반복한다. 상처는 팥 향을 먹고 내 이마에 무한정 전세로 자리 잡았다.

주문한 팥죽이 스테인리스 대접에 나온다. 자줏빛 국물 위로 하얀 면발이 날 유혹한다. 이마가 부딪힐 때 통증은 죽 그릇 수증기처럼 잡히지 않는다. 내 잃어버린 고통의 순간이 다른 앓이로 꼴을 바꾼다. 몸과 마음의 피로가 나를 계속 억누르면 뇌의 시냅스는 자연스레 팥죽을 불러댄다.

겨울보다 더위에 먹는 팥죽이 끌린다. 설탕 넣지 않은 한 그릇 죽에 내 긴장을 풀어 살살 달랜다. 그릇 바닥까지 숟가락으로 긁는다. 무심코 지나간 숟가락의 흔적에 얼굴 하나가 대접 바닥에 그려진다. 이마에 자리 잡은 상흔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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