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광양에서 찾은 숨은 고수... 소설 ‘1915’ 이준태 작가"

일제강점기 평범한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역사소설 ‘1915’는 2019년 도토리출판사에서 출간됐지만 독자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작가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연한 기회에 작가가 광양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인터넷서점에서 곧 바로 책을 사서 읽었다.

주인공 이현성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 악랄한 일제강점기를 살아내야 했던 선조들의 이야기, 역사적 사건 등의 서사가 촘촘하게 그려지고, 광양, 옥곡, 순천, 구례, 남원, 전주 등 전라선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동네의 당시 모습이 마치 다큐를 보듯 펼쳐졌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아, 이런 소설을 쓴 작가가 광양에 숨어 있었다니... ‘꼭’ 만나고 싶어졌다. -기자의 말-

▶광양의 숨은 고수 ‘이준태 작가’를 찾아서
‘광양의 숨은 고수’ 이준태 작가를 ‘발견’한 것은 가수 고 김민기 씨의 부고가 알려진 어느 날 저녁, 한 포털에서 서울대병원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광양에서 온 이준태 씨는...’ 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읽고 나서다.

기사를 캡처해서 지인들에게 보냈고, ‘이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이 보내 준 기사 링크를 열어보고 나서야 역사 장편소설 ‘1915’를 쓴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됐다. 작가를 찾고 싶으니 도움을 달라고 신문사에 메일을 보냈고, 며칠 후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이뤄진 작가와의 만남은 3시간 동안 이어졌다.

작가는 가수 고 김민기와의 개인적인 인연은 없다고... 80년대 중반, ‘중동’에서 일할 때 그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암울한 시대 동병상련을 겪은 동년배의 연민으로 친구 김용균(전 서울행정법원 법원장)과 함께 조문을 갔었다고 했다.

▶작가의 첫 작품, ‘소설 1915’는 ‘아버지에 대한 속죄의 마음’에서 시작
주인공 이현성은 작가의 큰 아버지다. 1915년생으로 당시 서울 중앙고보(현 중앙고등학교)를 다녔고, 이현성의 사촌 동생 이현철은 1917년생, 전주농림학교를 다닌 작가의 아버지다. 당시의 지식인 다수가 그랬듯 두 사람 모두 사회주의 사상에 빠졌다.

일제강점기 나라와 이웃을 사랑한 젊은 지식인들의 이야기, ‘소설 1915’는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꿈꿨던 이 두 사람에게서 모티브를 얻었다.

놀랍게도 작가는 이 소설이 60이 넘어서 펴낸 ‘첫 작품’이라고 했다.
어려서는 일기도 쓰지 않았고, 군대 간 친구들에게 답장도 안 쓸 만큼 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렇게 긴 대하소설을 쓰고 작가가 되었을까?

이준태 작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작가는 1954년생, 전북 김제가 고향으로, 익산 남성고와 전북대학교를 졸업했다. 건설이 한창이던 1980년대 초중반, 작가는 서울의 한 건설회사에 취직, 3년간의 중동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제철소 건설이 시작되던 광양으로 오게 됐다.

타향에서 사업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외로웠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쓴 글들이 호평을 받았다. 등단 권유까지 받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출판사를 통해 출간한 책은 ‘소설 1915’가 처음이다. 이 책을 쓰고 나서야 드디어 ‘작가’라는 말을 듣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됐다. 장편을 써놓고 이제 단편도 쓰고 중편도 쓸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이준태 작가는 “아버지는 투사 기질도 없었다. 세상에 그렇게 용한 분일 수가 없었는데 왜 좌익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찰로부터 끊임없는 감시를 받고 사셨다”며 “ ‘‘빨갱이 자식’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타인이 주는 상처보다 ‘니 애비가 빨갱이다’라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의 말은 더 많이 아프게 했다”고 회상했다.

좌익 꼬리표가 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 때문에 가족이 힘들게 살았던 적도 있었으나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작은 사업을 하면서 가정을 챙겼고,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아버지는 아들을 연좌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런 아버지 노력 덕분에 인천 연평도에서 해병대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칠 수 있었다.

책에 서평을 써준 신기남 전 국회의원은 해병대에서 만난 동기였다.

이 작가는 “자식들의 삶을 걱정하지 않는 아버지인 줄로만 알았고, 아버지에 대한 내면의 원망 같은 것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버지와 그다지 살갑게 지내지 못했다”며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형님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제서야 아버지께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팩트와 픽션이 섞인 ‘소설 1915’는 작가가 아버지 가슴을 아리게 해드렸을 불효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해방 후 혼돈의 공간에서 활동했던 얼치기 사회주의자들을 생각하면서 처음엔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오십여쪽을 써내려 갔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편소설의 주인공으로는 캐릭터가 약했고, 주인공을 바꿔 다시 쓰기 시작했다. 주인공 현성은 아버지가 친형제보다 더 가까이 지냈던, 작가의 집안을 ‘붉은빛’으로 물들인 아버지의 사촌형이었다. 현성은 소설에서처럼 고향 남원에서 촉망받는 청년이었고, 서울의 중앙고보를 나온 사회주의를 신봉했던 열혈 청년이었다.

소설을 쓸 때는 이미 그 시절을 증언해 줄 만한 어른들이 아무도 살아계시지 않았기에 작가는 그 시절의 신문, 소설, 잡지들을 일 년 이상 열독 했고, 작가는 그것을 바탕으로 그 시기의 시대적 배경에 맞추어 글을 써나갈 수 밖에 없었다.

▶작품속으로...
소설 1915는 취재와 집필을 병행, 4년여의 긴 시간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작품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그동안 작가가 살아오는 동안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다양한 사람들의 유형을 녹여낸 가상의 인물들이다.

교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박인수 라는 인물은 작가가 남성고를 다니던 시절,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화학 선생님이 모델이다. 서울과 지방의 문화 격차가 심했던 당시, 그는 50분의 수업시간 중 30분은 학과 수업, 20분은 학생들의 교양과 문화적 안목을 쌓는 데 도움이 되는 수업을 진행했다. 교과서에서 접할 수 없었던 좋은 노래를 가르쳐 주었고, 톨스토이, 세익스피어 등 세계적인 대문호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학생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스승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남원의 한 부농에서 아버지 상옥과 어머니 진안댁의 아들로 태어 난 주인공 현성은 부모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귀하게 자라 남원의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 중앙고보에 진학한다. 혜화동 이모댁에서의 중앙고보 학창 시절, 친구 경식과의 우정, 윤희와의 러브스토리, 선후배들과 나눈 지식·철학 토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진학, 변호사의 꿈, 지하조직에서의 독립운동 등의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중앙고보 재학 중 같은 반 김인수의 금장 손목시계 분실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까지 당하는 부조리를 경험한다. 교회 활동, 독서회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아를 완성해 가던 현성은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되고, 이후 브나로드 운동, 비밀결사단체 고려광복단 활동 등을 하게 된다. ​김인수의 금장시계를 훔친 고주석은 훗날 야비한 일제 순사가 되어 현성을 심하게 고문하고, 고문후유증으로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현성은 딸 하나를 남겨두고 생을 마감한다.

고주석은 가상 인물이지만 전형적인 친일파의 행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라남북, 서울 등 지리적, 공간적 범위가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어 마치 당시의 지형, 지물 다큐를 보는 것 같다. 광양 옥곡, 순천, 구례, 남원, 전주 등 우리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서 그런지 책장을 넘기는 재미가 한층 더 있다.

‘소설 1915’를 통해 일제의 악랄한 만행, 지식인들의 고뇌, 친일파들의 무자비함, 브나로드 운동, 사회주의 등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공부할 수 있다. 역사, 철학, 식물, 종교 등 광범위한 지식들이 총 망라 되어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영화 동주, 밀정, 대창 김창수, 박열, 봉오동전투, 영웅 등 일제강점기를 다룬 역사영화 몇 편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2019년에 세상에 나온 이 책이, 600여페이지 분량의 엄청난 이 책이 학생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고 많이 읽혀졌으면 좋겠다.

학교 서가에는 역사 필독서로 꽂히고, 지역 도서관에도 비치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섬진강을 사랑하는 광양 사람 ‘이준태 작가’
작가는 “글쓰기가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60이 넘은 나이에 작가가 된 힘의 원천을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어려운 상황에서도 책을 많이 사준 큰 누님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책을 읽었다”며 “누군가 문학에 대해 끌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지나온 삶이 훨씬 부드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사업을 하는 동안 힘든 순간들도 많았지만 견디다 보니 어느 순간 나만의 하늘이 열리고 사업이 번창하게 됐다. 그렇게 20여년간 사업을 했고, 15년 전 직원들에게 회사를 넘겨주고 지금은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작가는 매년 서울에 있는 친구, 지인들을 불러 아름다운 우리 산천을 돌아보고, 이 아름다운 산천을 지키기 위해 삶을 바쳤던 선열들의 삶을 되새겨 보는 ‘이준태의 섬진강 기행’에 나선다.

임실 옥정호에서 시작하여 순창, 남원, 곡성, 구례를 거쳐 광양 망덕포구에 이르는 오백오십리 길이다. 잠시 걷고 명소를 둘러보고 버스로 이동하는 여정이다. 그렇게 망덕포구에 도착하면 윤동주 유고보존 가옥을 꼭 들러 윤동주와 정병욱의 아름다운 브로맨스와 ‘일제강점기의 뜻있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참담하게 죽어갔는지,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와 행복은 거져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서로 나눈다.

매년 천리먼길에서 온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광양불고기와 숙소를 꼭 마련한다.

틈틈이 익힌 노래 실력은 음악회를 열 만큼 수준급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에서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 앞에서 ‘오솔레미오’를 열창한 적도 있다. 가족, 지인 등을 초대해 지금까지 10회의 음악회를 열었다.

부인은 한의학 박사 최정원 씨. 64만 구독자를 보유한 ‘허준할매건강tv’를 운영하는 파워 유튜버다. 슬하에 삼남매는 출가해 일가를 이루고 잘살고 있다.

이준태 작가는 “베이비붐 세대가 이제 거의 은퇴를 했다. 시니어가 물밀듯이 사회구성원으로 편입되고 있다”며 “문학, 음악, 미술 등 그들이 공감하고 교류하고 향유 할 수 있는 그런 좋은 문화공간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김영신 기자  ge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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