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커피를 다시 음미한다. 다들 마시는 커피가 아니다. 보통 커피는 원두를 투 샷 넣는다. 나는 그 아래인 원 샷도 아니고 그보다 아래인 0.5샷 커피를 마신다. 0.5샷을 요구하면 그녀가 나에게 눈길을 주며 연하게 드시는 거냐고 말을 건다. 나는 그냥 연한 게 아니라 투 샷 밑에 원 샷, 그 밑에 0.5샷이라 큰소리로 강조한다. 키오스크로 주문하고도 영수증을 뽑아 데스크에서 나만의 커피를 요청한다. 0.5샷이라 맛이 없는 게 아니다. 연한만큼 향이 부드럽고 깊은 맛이다. 연한 아아를 마시며 내가 젊은 시절 커피를 너무 진하게 마셨다는 느낌이 든다.

40세 전후, 하루에 커피를 머그잔으로 10잔 정도 마셨다. 컴 앞에서 글을 쓰거나 소파에 앉아 책 읽을 땐 으레 커피잔을 놓지 않았다. 입안이 텁텁하거나 밀려오는 잠을 견딜 때는 투 샷보다 더 진하게 마셨다. 50세 즈음에는 속이 자주 쓰린 탓에 커피를 줄여갔다. 그때부터 위장약과 혈압약을 함께 먹었다. 식이요법을 해도 혈압은 떨어지지 않았다. 속은 늘 쓰리고 밤에 잠을 설치고 두통에 시달렸다. 혈압이 더 올라가 약이 늘어났다. 위장약을 달고 살며 새벽에 눈 떠지면 이후 잠들지 못했다. 젊은 시절 맑던 머리는 감전된 것처럼 날 괴롭혔다. 혈압은 더 올라갔다. 하루 한 알 먹던 약이 세 알까지 늘어났다. 아침에 두 알 저녁에 한 알씩 날마다 먹었다. 나중엔 고지혈약까지 처방받았다. 커피를 줄이긴 했으나 하루에 서너 잔씩 즐겨 마셨다.

혈압약을 먹은 지 15년 남짓, 고지혈약을 먹은 지 3~4쯤 될 때 견디기 힘든 두통이 찾아왔다. 왼쪽 안구에서 시작한 통증이 측두엽을 지나 귓속을 후비고 목을 스치고 쇄골을 통과해 왼팔과 손가락 끝까지 퍼졌다. 쇄골도 쑤시고 아프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일상이 힘들었다. 그래도 커피를 하루에 서너 잔씩 보약처럼 챙겨 마셨다.

나는 통증 치료 병원에 가려다 머뭇거렸다. 약을 처방받을 텐데 이미 먹는 약을 바라보니 하루에 먹어야 할 약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결국에는 약에 치일 거라는 두려움이 들었다. 나는 치료를 보류하고 책을 주문했다. 고혈압과 통증에 관한 책들이었다. 열 권이 넘었다. 그 책을 다 읽은 후 나는 결단을 내렸다. 그 책들에는 먼저 3일 만 먹는 약이나 커피를 끊어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고혈압이어도 3일 안에 어떻게 되지 않으니 복용을 중지해보라는 말이었다. 나는 모든 약과 커피를 다 끊었다. 3일 만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를 괴롭히던 그 통증들 90%가 사라진 것이다. 덩달아 혈압도 떨어졌다. 혈압은 커피, 통증은 약들 탓이었다. 이후 통증 대부분이 사라졌다. 식이요법 덕에 고혈압도 정상에 가까웠다.

다 좋은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카페에 가 커피 향을 맡으면 금단현상이 생겼다. 손발이 떨리는 게 아니라 세상 사는 게 재미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울해진 것이다. 그래서 떠올린 게 0.5샷이다. 올여름 첫 아아 0.5샷을 마실 때 행복했다. 우울한 기분이 싹 사라졌다. 젊은 날 나는 커피를 너무 진하게 많이 마셨다. 그게 혈압을 올려 약을 먹게 하고 통증을 유발해 속이 쓰리고 밤잠을 설치게 한 것이리라. 지금은 한 알의 약도 안 먹는다. 통증은 어쩌다 가볍게 느끼고 혈압도 정상에 가깝다. 혹여 통증 치료 병원에 갔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약 대신 책을 먹은 셈이다. 내게 진한 커피는 차가 아니라 독이었다. 그걸 몸이 말해준다. 하루 한 잔 마시는 0.5샷 아아 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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