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고향은 밤 주산지였다. 달밤에 피어난 밤꽃은 어느 꽃향기보다 강렬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70년대 말이었다. 나는 가족과 떨어져 고등학교에 다녔다. 고향으로부터 먼 경상도에서 주경야독을 했다.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진 탓인지 부모가 보고 싶었다. 설핏 기우는 해거름에도 오목가슴이 아렸다.

어느 날 그리움을 참지 못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고향길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출발할 때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고향에 가까워지자 차창 밖으로 비가 내렸다. 진상역에서 고향마을은 족히 십여 리를 걸어야 했다. 가로등 불빛은 구경조차 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도착한 대합실은 희미한 백열등이 졸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손님은 서너 명이었다. 나는 역사를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블랙홀 같은 어둠이 내 발을 붙들었다. 어느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어둠을 밟아 집까지 걸어갈 것을 생각하니 공포가 시퍼렇게 날을 세웠다. 몰려오는 걱정이 물에 젖은 빨래처럼 무거웠다.

그때 그가 나타났다. 그는 단발머리 여고생이 걱정스러운지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아랫마을 삼정이라 했다. 그는 작은 편이지만 대학생풍으로 보였다. 그는 체구에 비해 큰 오토바이 곁에 서 있었다. 오토바이에 나를 태워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다. 분명 하늘이 나를 위해 그를 보낸 거야. 어두운 길을 걸어가며 느끼는 두려움보다 내 몸을 잘 지키며 타고 가면 돼. 혹시 나쁜 사람이면 재빠르게 도망가지 뭐. 온갖 상념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육상선수까지 했다는 어이없는 자신감으로 오토바이 뒤에 탔다.

마을까지 가는 길은 사람과 오토바이를 통째로 잡아 삼킬 듯 질척거렸다. 보리타작을 막 끝낸 들녘은 고요 속에 묻혔다. 동네 어귀에 가까웠을 때 농로는 보리타작으로 보리 짚이 길을 덮어버렸다. 나중에는 오토바이 바퀴에 짚이 끼어버렸다. 오토바이는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터덕거리며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고향 삼정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신음을 토하더니 멈춰버렸다.

난 그에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가 나더러 어서 집에 가라 했다.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도 하지 못했다. 고개만 꾸뻑이고 집을 향해 내달렸다. 연락 없이 깜깜한 늦은 밤에 도착한 나를 보고 부모님은 깜짝 놀랐다. 자초지종을 듣더니 고마운 사람 이름도 물어보지도 않았느냐는 아쉬움이 뒤따랐다.

세월이 흘러 나는 그와 대면했던 진상에서 파출소 소장으로 근무를 했다. 밤꽃이 향기를 터뜨리던 날 그가 생각났다. 나는 직원들에게 그 얘기를 했다.

“소장님, 지랑마을 이장의 형님 같네요. 그때는 오토바이 있는 집을 손에 꼽았어요. 지랑마을 이장님이 체격도 비슷하니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붙잡고 지랑마을 이장에게 물어봤다. 이장은 ‘형님이 병환으로 몇 해 전 돌아가셨어요. 형님에게서 단발머리 여학생 태워주다 오토바이에 보리 대궁이 껴 힘들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라고 했다.

단발머리 여고 시절 늦은 밤 나의 귀향은 그의 도움으로 안전했다. 철없던 난 그에게 의심 스펙트럼까지 발사했으니. 그에게 마음의 빚을 갚고 싶다. 잊히지 않는 그로 인해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야 하는가? 그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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