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짓점 없는 책꽂이들이 5층으로 쌓여 방안 벽 4면을 축대처럼 둘러쌌다. 방의 반자까지 닿았다. 창만 가리지 못했다. 창밖 비 내리는 바깥이 우울하다. 그가 창문을 여니 바람이 몰려와 책 축대를 훑는다. 따라 들어 온 장마철 습기가 책들을 덮친다. 축대는 습기가 두렵다. 내가 그에게 창문 닫으라 소리치려 한다. 그의 멱살도 잡으려 한다. 그가 나를 밀친다. 나는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축대는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펼쳐본 지 오래된 책들은 장작더미를 쌓아놓은 듯하다. 다섯 단으로 층층이 올려진 불쏘시개들을 품은 책장은 나무들의 납골당이다. 글쓴이들의 영혼까지 함께 매장해버린 책들의 무덤이다.

보들레르는 책을 시체 같고 미라처럼 깊이 잠자고 팔리지 않는 인체해부도라 <악의 꽃-11, 불운>에서 말했다. 이에 사르트르도 서재를 묘지와 납골당의 항아리로, 책을 벽에 기댄 널빤지 위에 늘어놓은 작은 관들이라 했다. 또 나중에 죽은 자가 먼저 죽은 자들을 쓴 것이라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다.

나는 축대에 책을 꽂을 때마다 내 넋을 조금씩 떼어 함께 쑤셔 박았다. 이젠 책을 넣을 자리도 더 떼어 낼 혼도 없다. 축대 속 책을 꺼내 펼쳐 봐야 그 속에 담긴 내가 발효하는데. 담아 넣은 얼의 열 배 스무 배가 되어 내게 되돌아온다. 이제는 내 할 바를 다 하지 못한다.

사색보다 가볍게 히히~ 웃는 게 편한 탓이다. 스스로 웃기보다 웃어주길 바라는 무언가의 아바타가 돼버렸다. 웃음은 가볍고 책은 무겁다. 나를 기다리던 책들이 누렇게 스러진다. 축대에서 하릴없이 흙으로 돌아가려는가.

그가 책을 되살리려 한다. 말라가는 내 영혼을 꺼내려는 것이다. 나는 싫다고 이제는 길들여진 대로 편하게 웃으며 살거라 앙탈을 부렸다. 미루고 미루던 그가 장마철에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그를 막아야 해. 나는 그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내게 남은 한 가닥 양심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나의 양심이 그의 고향인 탓이다. 양심을 움직이려는 그에게 내가 져주지 않으면 그는 돌아갈 곳이 없다. 나는 방바닥에서 일어나 축대로 다가간다. 돌멩이가 돼버린 책들. 먼지떨음마저 하지 않았다. 먼저 나를 털어야 한다.

창문을 바라보며 내 가슴을 열어 보이는데 갈비뼈 먼지가 책 먼지보다 무겁다. 불쌍한 내 영혼. 이젠 회복하지 못하나 보다. 나의 절망을 바라보던 그가 손사래 친다. 다시 그가 축대를 맴돈다. 탑돌이 하듯 방을 맴돈다. 나를 위해 두 손을 모은다. 그의 합장한 손끝에서 장마철 습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이어 축대로 뻗친다. 물줄기가 되어 책으로 스며든다. 책 먼지가 사라진다.

내가 놀라며 다시 그에게 달려든다. 그가 꼼짝하지 않는다. 내 눈에 그의 손끝이 뚜렷하다. 투명한 활자들이 습기와 버무려진다. 창밖에서 끌어들인 습기와 그의 내공에서 솟아난 활자가 뒤섞여 빗줄기처럼 뻗친다. 책으로 들어가 문장이 되는 걸까. 물방울이 뭉쳐 빗줄기가 되듯 활자가 반죽 돼 문장이 되는가. 책들이 소생하는가. 그가 나를 껴안는다. 내 갈비가 축축해지며 뭔가 들어찬다. 그가 스며든다.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책장의 책들이 숨을 쉰다. 빗방울 같은 활자들, 빗줄기 닮은 문장들이 빛난다. 나는 그와 더불어 가벼운 웃음을 버리고 책을 펴며 깊은 사색에 잠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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